
추석 연휴에 일본인 친구 부부가 한국을 찾아왔습니다. 가족이 없어 늘 조용히 보내던 명절이었는데, 그 해만큼은 달랐습니다. 전을 네 시간 부치고, 천체망원경으로 보름 달을 들여다보고, 집 있는 재료로 즉석 한일 공동 음식까지 만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세계 곳곳에 우리 추석과 닮은 명절이 있었고, 그 핵심은 어디서나 같았습니다.
가족이 없어도 명절은 만들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명절마다 여행을 떠납니다. 가족이 없으니 차례를 지낼 이유도, 모일 사람도 없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추석이라는 단어가 조금 공허하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추석은 달랐습니다. 일본인 친구 부부가 마침 한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고, 우리 집에서 같이 명절을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건 그쪽도 사정이 비슷했다는 겁니다. 일본에서도 주변에 모일 가족이 없어서 그냥 여행이나 가자고 했던 거라더군요. 양쪽 다 명절을 혼자 보내던 두 부부가 만나 뜻밖의 명절을 만들어낸 셈입니다. 생각해 보면 명절이란 게 본래 이런 것 아닐까요? 혈연이 아니더라도, 같은 시간에 같은 밥상에 앉는 것 자체가 명절의 본질일 수 있으니까요.
그 친구 부부는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어를 독학했습니다. 덕분에 언어 장벽은 거의 없었고, 저희도 일본 여행을 다니면서 그 친구한테 배운 일본어로 간간이 대화를 나눴습니다. 말이 통하니 명절 준비가 훨씬 유쾌해졌습니다.
아내와 저는 음식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외국인 손님을 위해 메뉴를 고민하다가 잡채, 산적꼬치, 불고기, 그리고 전으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전이 문제였습니다. 저는 데드리프트 70kg를 들 정도로 체력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스레인지 앞에 네 시간을 서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고통이었습니다. 허리는 뻐근하고 팔은 쑤셨지만, 맛있게 먹을 사람들 얼굴을 떠올리니 그래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 명절 음식 준비에서 전 부치기가 제일 힘든 건 아마 다들 공감하실 겁니다.
예전에 어머니들이 명절이 끝나면 몸살이 생기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송편은 직접 만들기엔 너무 손이 많이 가서 떡집에서 구매했습니다. 사실 이게 현실적인 선택이기도 합니다. 음식 준비를 하는 동안 집 안은 온통 난장판이 됐지만, 오랜만에 명절다운 명절을 보낸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습니다.
조상을 기리는 방식은 달라도, 마음은 어디서나 같습니다
이번 추석을 계기로 세계 명절 문화를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그냥 우리나라만의 문화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 비슷한 형태로 존재하더군요. 그 공통 키워드는 두 가지입니다. 조상 숭배와 수확 제의입니다.
추석은 한해의 농사로 수확을 해서 조상님들에게 한해동안 풍성하게 수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명절이라고 일본 친구에게 말해 줬더니 일본에서도 비슷한 의미의 명절인 오봉절이 있다고 말을 하더군요.
일본인 친구 아내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의 오봉절(お盆)은 양력 8월 15일에 지낸다고 합니다. 조상의 영혼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일본 고유의 명절로, 집 앞에 불을 피워 영혼을 부르고 마을 사람들이 봉오도리라는 춤을 추며 밤을 보내기도 한다는데 특히 오봉절에는 츠키미(月見)를 먹는 풍습이 있습니다.
세계 각국의 명절은 형식은 달라도 수확을 감사하는 마음과 조상을 기리는 마음이 민족과 종교를 초월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한국민속학회의 연구에서도(출처: 한국민속학회) 추석의 기원은 농경 사회의 수확 제의에서 출발했으며, 이 구조는 동아시아 전반에 공통으로 나타난다고 분석합니다. 제가 직접 그 일본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눠 보니, 오봉절이나 추석이나 결국 "살아있는 사람이 모여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날"이라는 데서 완전히 일치했습니다.
천체망원경과 츠키미, 그날 밤이 만들어낸 것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우리 넷은 밖으로 나왔습니다. 추석 보름달이 크고 선명하게 떠 있었습니다. 저는 미리 준비한 천체망원경을 설치했습니다. 대형 장비는 아니지만 달 표면의 크레이터(crater)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의 망원경이었습니다. 초점을 맞추자 망원경 너머로 달 표면의 굴곡이 선명하게 나타났고, "달 표면에는 정말 운석이 많이 부딪혔구나" 라는 말을 하면서 일본인 부부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 순간 친구가 말했습니다. "오봉절에도 달을 봅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본 건 처음이에요." 같은 달을, 서로 다른 이름의 명절에, 같은 마음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날따라 묘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의 하이라이트는 즉석 음식 협업이었습니다. 친구 부부가 고맙다며 츠키미를 만들어 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재료가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 집에 있는 반죽 재료를 꺼내서 함께 변형 츠키미를 만들었습니다. 이름은 굳이 붙이지 않은 한일 공동 명절 음식이 탄생한 겁니다. 만들때 반죽의 농도를 잘 못 맞춰서 한참을 애를 먹었고 속에는 무엇을 넣어야 하는지 몰라서 검색을 했는데 집에 가지고 있는 재료가 없어서 그냥 있는 재료를 넣었더니 오묘한 맛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 부부도 웃고 우리 부부도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만들기는 어설프게 만들었지만 솔직히 맛이 그럭저럭 괜찮은 맛이었습니다. 하지만 친구 부부가 만들어준 츠키미의 의미만큼은 충분했고, 그 맛은 지금도 기억납니다.
제 경험상 명절이 특별해지는 건 음식의 완성도보다 그걸 만드는 과정과 함께하는 사람 덕분인 것 같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대립과 협력을 반복해 온 관계입니다. 하지만 그날 저희 네 명은 그런 국제 관계와 무관하게 그냥 같은 달을 바라보며 같은 밥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명절이 원래 그런 역할을 하는 것 아닐까요? 다른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것.
이번 추석 경험은 저에게 명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 시간이었습니다. 가족이 없어도 명절은 만들어질 수 있고, 국적이 달라도 같은 감정을 나눌 수 있다는 걸 직접 확인했습니다. 올해 추석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이라면, 꼭 대단한 준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같이 달 한번 올려다볼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명절이 됩니다.
--- 참고: https://www.tourtoctoc.com/news/articleView.html?idxno=1935